삼한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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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한 정벌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징고 황후의 한반도 정벌 설화로,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대별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전전 시대에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비판적인 시각이 대두되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문헌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삼한 정벌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삼한 정벌의 동기가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 왔다. 삼한 정벌과 관련된 신사, 사적, 전승이 일본 각지에 남아 있으며, 중국과 조선의 사서에서도 왜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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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 정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전투 명칭 | 삼한정벌 |
| 관련 캠페인 | 해당 없음 |
| 충돌 | 삼한정벌 |
| 시기 | 불명 |
| 장소 | 한반도 |
| 결과 |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진출 |
![]() |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왜 |
| 교전 2 | 삼한 신라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진구 황후 |
| 지휘관 2 | 불명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불명 |
| 병력 2 | 불명 |
| 사상자 및 피해 | |
| 사상자 1 | 불명 |
| 사상자 2 | 불명 |
2. 역사적 배경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 설화가 등장하는데, 재물과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 그리고 신라를 복종시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부리겠다는 뜻)로 삼으려는 의도가 나타나 있다.[76] 이는 신라를 비하하는 동시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인식을 보여준다.[76]
가마쿠라 시대 말기의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갑본(甲本)에는 정벌 동기가 재물 욕심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신라가 먼저 일본을 침공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76]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화살촉을 시위에 끼우기 위해 만든 부분)로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신라국대왕일본지견야일본어)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형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의 《태평기》 39권 〈신공황후공신라급사〉(神功皇后攻新羅給事)에서는 《하치만구도쿤》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표현이 새롭게 등장하며, 이 때의 삼한은 고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6]
2.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로서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 신라를 항복시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것으로,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76] 이는 신라를 비하하려는 의도와 함께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모를 보여준다.[76]가마쿠라 시대 말기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갑본(甲本)에서는 정벌 동기가 재물 욕심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일본을 먼저 침공했다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76] 또한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화살촉을 시위에 끼우기 위해 만든 부분)로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형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 39권 〈신공황후공신라급사〉(神功皇后攻新羅給事)에서는 이야기의 뼈대는 《하치만구도쿤》과 유사하나,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하며, 여기서 삼한은 당시 한반도 국가인 고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로 인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720년에 완성된 이 기록은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쓰다 소키치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 황후 전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정벌"이 '사실 기록이나 구전 전승이 아니라, 꽤 후대에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힐 즈음에 꾸며진 이야기'라고 분석하며, 전설의 성립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또는 긴메이 천황 시대로 추정했다.
2. 2. 일본 역사학의 해석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로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 그리고 신라를 항복시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6] 이 기록은 신라를 비하하는 동시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모를 보인다.[76]가마쿠라 시대 말기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갑본(甲本)에서는 정벌 동기가 재물 욕심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먼저 일본을 침공했다는 내용이 새롭게 등장한다.[76] 또한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화살촉을 활시위에 끼우기 위해 만든 부분)로 돌에 “신라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형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 39권 〈신공황후공신라급사〉(神功皇后攻新羅給事)에서는 이야기의 기본 틀은 《하치만구도쿤》과 같지만,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하며, 여기서 삼한은 당시 한반도 국가인 고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로 인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20년에 완성된 이 기록은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 출병의 명분, 즉 '조선은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 고쿠가쿠 연구에서는 삼한정벌과 임진-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武家事紀) 등)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경향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이어져 정한론이 대두되었을 때,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한일병합),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과 함께 외지(外地,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동화 정책(황민화 교육 등)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황국사관의 제약으로 인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묶어 부르는 기키(記紀)의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진구 황후의 존재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 황후 전설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정벌"에 대해 '사실 기록이나 구전 전승이 아니라, 꽤 후대에, 아마도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힐 무렵에 이야기로 꾸며진 것 같다'고 분석하며, 전설이 성립된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또는 긴메이 천황 시대로 추정했다. 쓰다의 견해는 당시 황국사관에 위배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쓰다 자신도 큰 곤욕을 치렀다.
3. 삼한정벌의 내용
일본서기에 기록된 삼한정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년 9월, 주아이 천황은 신공황후와 함께 구마소 토벌을 위해 현재의 후쿠오카시 하카타에 있는 가시이 궁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신공황후가 신내림을 받아 신탁을 받았는데, 구마소보다 보물이 있는 신라를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아이 천황은 이를 믿지 않고 신을 의심했다. 신은 주아이 천황이 아닌 그의 자식이 신라를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4] 주아이 천황은 신탁을 무시하고 구마소 정벌에 나섰지만 패하고, 200년 2월 카시이노미야에서 사망했다. 황후 등은 신의 신탁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유해는 다케우치노 스쿠네에 의해 해로로 아나토를 거쳐 도요우라노미야에서 빈소되었다. 『천서기』에는 구마소의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아이 천황이 급사한 후, 진구 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을 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사궁에 들어가 스스로 신주가 되어 곰소를 토벌하고, 스미요시 대신의 신탁으로 신라 정벌에 나섰다. 뱃속에 아이(훗날 오진 천황)를 임신한 채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조공을 맹세했다. 고구려・백제도 조공을 약속했다고 한다.[6]
진구 황후 섭정 5년(205년 또는 325년) 3월 7일, 신라 왕의 사자가 미시칸키의 처자 반환을 요구했다. 진구 황후는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냈으나, 쓰시마에서 속아 미시칸키가 도망쳤다. 소츠히코는 세 사자를 불태워 죽이고, 타타라쓰(부산 남쪽 다대포)에서 상륙하여 초라성(경상남도양산)을 공격해 포로를 데려왔다.
신공 황후 46년(246년 또는 366년) 이후, 사마숙네를 탁순국에 보내고, 백제와 교류하며 조공을 받았다. 신공 황후 49년(249년 또는 369년)에는 장군 황전별(아라타와케) 및 녹아별(카가와케)을 탁순국에 파견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했으나, 백제 장군들과 합류하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 남가라, 㖨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개국을 평정했다.[8] 신공 황후 52년(252년 또는 372년) 9월 10일, 백제왕은 칠지도를 헌상했다.[8]
진구 황후 62년(262년 또는 382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신라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9] 백제기에 따르면 382년에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를 파견하여 신라를 토벌했지만, 그는 신라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한다.[9]
3. 1. 가시이 궁 신탁과 주아이 천황
199년 9월, 주아이 천황은 신공황후와 함께 구마소 토벌을 위해 나현(현재의 후쿠오카시 하카타[5])의 카시이노미야(현 가시이 궁)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신내림을 받은 신공황후로부터 신탁을 받았다. 신탁에서는 구마소보다 보물이 있는 신라를 공격하라고 했다. 그러나 주아이 천황은 이를 믿지 않고 높은 언덕에 올라 바다를 보았지만, 그런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며 신을 의심했다. 신은 주아이 천황이 그 나라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의 자식이 그것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4]주아이 천황은 신탁을 듣지 않고 구마소 정벌을 감행했지만, 패전하여 철퇴했다. 200년 2월, 지쿠시국의 카시이노미야에서 붕어했다. 황후 등은 이를 "신의 신탁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했다. 유해는 다케우치노 스쿠네에 의해 해로로 아나토를 거쳐 도요우라노미야에서 빈소되었다. 『천서기』에서는 구마소의 화살에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3. 2.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thumb 월강방년。]]thumb 우타가와 쿠니요시。]]
주아이 천황이 급사한(200년) 후, 진구 황후는 201년부터 269년까지 정사를 수행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사궁에 들어가 스스로 신주가 되어 곰소를 토벌하고, 스미요시 대신의 신탁으로 신라 정벌에 나섰다. 뱃속에 아이(훗날 오진 천황)를 임신한 채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조공을 맹세했다. 고구려・백제도 조공을 약속했다고 한다[6]。
바다를 건널 때에는 배에 월연석이나 진회석이라고 불리는 돌을 대고 헝겊으로 감아 차갑게 하여 출산을 늦췄다. 월연석은 3개가 있었다고 하며, 나가사키현이키시의 월독신사, 교토시니시쿄구의 월독신사, 후쿠오카현이토시마시의 진회석 팔만궁에 봉납되었다. 하리마국 풍토기에는 하리마에서 채취한 적토로 하늘의 역극(아마노사카호코)이나 군의 등을 물들였다고 하며, 신라 평정 후 그 신을 기이의 간가와 후지시로 봉우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7]。
황후는 귀국 후 지쿠시 우미에서 오진 천황을 출산하고, 시메에서 산실을 갈았다. 신라 진압의 증거로 깃발 8자루를 대마 상현군 미네정에 납입했다(기사카 팔만궁)。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 후 기내로 돌아갈 때, 황자(오진 천황)의 이복 형인 향판 황자, 오시쿠마노 미코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타케후루쿠마노 미코토의 활약으로 평정했다.
『고지키』・『일본서기』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복속을 맹세하고 신라왕이 왕자 미시코치하토리간키를 인질로 보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진구 황후 섭정 5년(205년 또는 325년) 3월 7일, 신라 왕의 사자 한레이시호, 모마리시치, 호라모치가 미시칸키의 처자 반환을 요구했다. 진구 황후는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 감시했으나, 쓰시마에서 속아 미시칸키가 도망쳤다. 소츠히코는 세 사자를 불태워 죽이고, 타타라쓰(부산 남쪽 다대포)에서 상륙하여 초라성(경상남도양산)을 공격해 포로를 데려왔다. 이들은 쿠와바라, 사비, 타카미야, 시노우미 네 촌 한인의 조상이다.
3. 3. 신공황후 46년 이후
신공 황후 46년(246년 또는 366년) 3월 1일, 사마숙네를 탁순국에 보냈다. 탁순왕의 말금한기는 백제의 구저, 미주류, 막고 등이 일본에 조공하고 싶다고 사마숙네에게 전했다. 사마숙네는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를 백제에 보냈다. 백제의 소고왕(근초고왕)은 기뻐하며 재보를 보내고, 창고를 보여주며 조공 의사를 밝혔다. 이후 사마숙네 등은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듬해 4월, 백제는 일본에 조공했다.[8]신공 황후 49년(249년 또는 369년) 3월, 신공 황후는 장군 황전별(아라타와케) 및 녹아별(카가와케)을 탁순국에 파견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병력 증강 진언에 따라 백제 장군 목라근자, 사사노궤(사사나코), 사백(사하쿠), 개로(카후로)에게 합류를 명하여 신라를 격파했다. 비자발(히지호), 남가라, 㖨국(토쿠노쿠니), 안라(아라), 다라(타라), 탁순, 가라 7개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비리(히리), 벽중(헤츄), 포미지(호무키), 반고(한코) 4개 읍을 항복시켰다.[8]
신공 황후 51년(251년 또는 371년) 3월, 백제는 구저를 파견하여 일본에 조공했다.[8]
신공 황후 52년(252년 또는 372년) 9월 10일, 백제왕은 백제와 왜국의 동맹을 기념하여 신공 황후에게 칠자경과 칠지도를 헌상했다.[8]
3. 4.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신라 정벌
진구 황후 62년(262년 또는 382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신라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9]백제기에 따르면 382년에 신라가 일본에 조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를 파견하여 신라를 토벌했다. 그러나 그는 신라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가야 국왕 기조기, 아들 백구지 등은 백제로 망명했다. 가야 국왕의 여동생 기전지가 야마토의 천황에게 직접 호소하자 천황은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를 공격하여 가야를 되돌렸다. 또한 그는 천황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음을 알고 돌구멍에서 자살했다고도 한다.[9]
4. 각국 사서의 관련 기록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가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이었고, 황후가 신라를 항복시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것으로,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 하였다고 쓰여 있다.[76] 이 기록은 신라를 비하하려는 의식과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76]
가마쿠라 말기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일본어) 갑본(甲本)에서는 정벌 동기가 재화, 보물에 대한 욕망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었고,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일본을 먼저 침공했다는 내용이 새롭게 창작되었다.[76] 또,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로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 39권의 〈신공황후공신라급사〉(神功皇后攻新羅給事일본어)에서는 이야기 뼈대는 《하치만구도쿤》과 같으나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며, 그 때의 삼한은 동시대 한반도 나라인 고려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을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이 삼한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조선 출병에 개전 명분, 즉 ’조선은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적극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고쿠가쿠 연구에서 삼한정벌 및 이를 대의명분으로 써먹은 임진-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武家事紀)》 등)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어 정한론이 대두하였을 때와 실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하였을 때(한일병합),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과 외지(外地, 일본 제국의 식민지를 가리키는 용어)에 대한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이 진행될 때도 그 사상적 바탕을 이루었다. 황국사관에 의한 제약 때문에 기키(記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묶어서 부르는 명칭)의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진구 황후의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황후의 전설은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였다. "신라 정벌"에 대해선 '사실의 기록 또는 구비전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꽤 후대에 아마도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혀질 쯤에 이야기로서 꾸며진 것 같다'라고 분석하면서, 전설이 성립된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때나 긴메이 천황 때라고 서술하였다. 쓰다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황국사관을 거스르는 것으로 문제가 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당했으며, 쓰다 자신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왜국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에 침공한 기록은, 조선의 사서인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2011년에는 신라가 왜의 조공국이었다고 기록된 양직공도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4. 1. '삼한' 및 신라
신라는 기원전 2세기 말부터 4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진한의 후계 국가로 여겨진다. 진한은 마한, 변한과 함께 삼한으로 불린다. 또한 『일본서기』 및 당[13]에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를 삼한이라고 부른다.진한은 진한(秦韓중국어)이라고도 불리며, 중국 진나라의 노역에서 도망쳐 온 진나라 사람들의 국가라고 하며, 언어도 진나라 사람(중국인)과 유사했다고 한다(『진서』 진한전[14] 및 『북사』 신라전[15]). 『북사』 신라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新羅、其先本辰韓種也。地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地。辰韓亦曰秦韓。耆老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중국어 따라서 진한(진한)의 백성은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으로 여겨지지만[16], 중국 정부 산하 연구 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은 진한을 중국 진나라의 망명자들이 세운 정권으로, 중국의 번속국으로서 당나라가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17]
4. 2. 개사 및 연표
신화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즉위 전기〉(神功皇后即位前紀)에는 삼한정벌의 동기로서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이 있었고, 황후가 신라를 항복시켜 복종의 의미로 '우마카이'(馬飼い; 말처럼 여겨달라는 것)로 삼으려 하였다고 쓰여져 있다.[76] 이 기록에는 신라를 비하하려는 의식과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이 나타난다.[76]가마쿠라 말기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일본어) 갑본(甲本)에서는 정벌 동기가 재화, 보물 욕망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삼한 정벌에 앞서 신라가 일본을 먼저 침공했다는 내용이 창작되었다.[76]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화살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로 돌에 “신라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新羅国ノ大王ハ日本ノ犬也(なり))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 39권 〈신공황후공신라급사〉(神功皇后攻新羅給事일본어)는 이야기 뼈대가 《하치만구도쿤》과 같으나 “삼한의 오랑캐”(三韓の夷(えびす))'라는 말이 등장하며, 그 삼한은 당시 한반도 나라인 고려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로 한반도가 일본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720년 완성된 일본서기 기록을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정유재란 조선 출병 때, ’조선은 진구황후 삼한정벌 이래 일본 속국이므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개전 명분이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 고쿠가쿠 연구에서 삼한정벌 및 임진-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야마가 소코 《무가사기(武家事紀)》 등)가 퍼졌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정한론, 대한제국 병합(한일병합),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과 외지(外地, 일본 제국 식민지)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황국사관 제약으로 《고사기》, 《일본서기》를 묶어 부르는 기키(記紀)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터부시되어 진구 황후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고전의 연구》에서 진구황후 전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신라 정벌"은 '사실 기록 또는 구비전승이 아니라 후대에 신라 정토(征土) 진실이 잊혀질 쯤 꾸며진 것 같다'고 분석, 전설 성립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이나 긴메이 천황 때로 서술했다. 쓰다 견해는 황국사관에 거슬려 발매금지, 곤욕을 치렀다.
왜국이 신라 등 한반도 침공 기록은 조선 사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기록되었고, 2011년 신라가 왜 조공국이라 기록된 양직공도가 발견되었다.
다음은 각국 사서를 바탕으로 삼한 정벌 관련 신라, 왜국, 백제 등의 역사를 정리한 표이다.[18][19] 연대는 계산에 따라 다르므로, 삼한 정벌을 특정할 수 없는 이상 신라, 왜국 등 관계 제국 사서 기록을 망라한다.
| 연도 | 신라 | 왜 | 백제 | 기타 |
|---|---|---|---|---|
| 기원전 50년 | 왜인 침공, 혁거세 거서간 설득으로 철수. 호공은 본래 왜인.[18] | |||
| 14년 | 왜인 병선 100여 척으로 해안 민가 약탈. 낙랑군 수도 공격, 유성우로 물러감.[18] | |||
| 57년~80년 | 탈해 이사금은 왜국 동북 1천 리 다파나국 왕자. 석씨는 왜와 교역한 왜인 씨족.[18] | |||
| 73년 | 왜인 목출도(경상남도울산광역시 목도) 진입, 우오 전사.[18] | |||
| 77년 | 가야와 싸워 대승, 길문 파진찬 승진.[18] | |||
| 121년 | 대증산성(부산 동래구) 축조, 왜인 동부 해안 침입.[18] | |||
| 123년 | 왜국과 강화.[18] | |||
| 158년 | 왜인 방문.[18] | |||
| 173년 | 히미코 사신 파견 (조작 가능성).[18][23] | |||
| 193년 | 왜인 기근, 1천여 명 신라 유입.[18] | |||
| 200년 | 진구 황후, 쓰시마 거쳐 신라 왕도 도착. 신라 왕 파사미면 항복, 미척기지 파진간기 인질, 공납 맹세.[19] | |||
| 205년 | 인질 미척한기 신라 도망.[19] | |||
| 208년 | 왜인 국경 침범, 석리음 반격. | |||
| 232년 | 왜인 금성 침입, 왕 출진, 격퇴, 수급 1천.[18] | |||
| 233년 | 왜인 동부 국경 침입, 석우로 사도에서 격퇴, 병선 소각.[18] | |||
| 249년 | 왜인 석우로 살해.[18] | 황전별, 녹아별 파견, 목라근자와 신라 공격.[19] | ||
| 262년 | 갈성습진언 파견, 신라 토벌.[19] | |||
| 272년 | 기각숙네 등 파견, 백제 진사왕 무례 질책, 아신왕 옹립.[19] | 진사왕 사망. | ||
| 277년 | 아신왕 아들 전지왕 인질. | |||
| 283년 | 궁월군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라국 백성 체류 보고.[19] | |||
| 285년 | 평군목토숙네, 적호전숙네 가라 파견, 신라 공격 명령.[19] 신라 왕 복종, 궁월 백성, 습진언과 귀환.[24][25] | 아신왕 사망, 전지왕 즉위.[19] | ||
| 287년 | 왜인 일례부 방화, 1천 명 포로.[18] | |||
| 292년 | 왜병 사도성 함락 시도, 대곡 구원 실패.[18] | |||
| 294년 | 왜병 장봉성 함락, 사도성 개축, 사벌주 유력 80여 호 이주.[18] | |||
| 297년 | 이서국 공격, 죽엽군 도움 방어.[18] | 고구려 왕 조공, 태자 토도노 와카이로코 무례 분노, 표 파기.[19] | 고구려 | |
| 300년 | 왜국과 사신 교환.[18] | |||
| 307년 | 국호 신라 복귀.[27] | |||
| 312년 | 왜 국왕 왕자 통혼 요구, 아찬 급리 딸 혼인.[18] | |||
| 323년 | 신라 조공.[19] | |||
| 329년 | 신라 조공 게을리, 지전숙네, 현유신 파견 추궁.[19] | |||
| 344년 | 왜국 통혼 재요구, 거절.[18] | |||
| 345년 | 왜국 국서, 국교 단절.[18] | |||
| 346년 | 왜국 풍도 습격, 금성 포위, 강정 진언, 왜군 격퇴.[18] | |||
| 353년 | 기각숙네 백제 파견, 국경 획정, 주군 쇠사슬 묶어 일본 압송.[19] | |||
| 364년 | 왜군 침입, 짚 인형, 복병 격퇴.[30] | |||
| 365년 | 죽엽세, 다도 신라 정벌, 신라군 격퇴, 포로 획득.[19] | |||
| 391년 | 왜, 백제, 가라, 신라 격파, 신민 삼음.[32] | |||
| 392년 | 고구려, 신라 사신, 실성 이사금 인질. | 광개토대왕 백제 공격, 10여 성 함락, 진사왕 사망.[31] | 고구려 | |
| 393년 | 왜군 금성 포위, 기병, 보병 협공, 대패.[18] | |||
| 397년 | 아신왕 아들 전지왕 인질, 복속. | |||
| 399년 | 백제, 고구려 맹세 파기, 왜와 화통.[32] 신라, 왜군 침입, 고구려 구원 요청.[32] | 고구려 | ||
| 400년 | 고구려, 신라 5만 명 파병, 왜군 임나, 가라 후퇴, 안라군 역습, 신라 수도 점령.[32] | |||
| 402년 | 미사흔 인질. | 왜국과 통호. | ||
| 404년 | 대방군 왜군 공격, 고구려 격퇴.[32] | |||
| 405년 | 왜병 명활성 공격.[18] | 아신왕 사망, 전지왕 즉위. | ||
| 407년 | 왜인 동, 남쪽 변방 침략.[18] | |||
| 418년 | 미사흔 도망.[18] |
4. 2. 1.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 제군사
413년부터 478년까지, 왜의 오왕은 동진과 송에 조공하여 한반도 남부에서의 왜국의 지배권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구했다.[33] 438년까지 왜왕 찬을 계승한 동생 진은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을 자칭했고,[34] 같은 해 4월 송의 문제(文帝)는 진을 "안동장군 왜왕"으로 삼았다.[35]451년, 왜왕 제는 송의 문제로부터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를 가호받았다. 478년, 제의 뒤를 이은 아들 흥이 죽고 왕이 된 흥의 동생 무는 송의 순제로부터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서임되었다. 무는 백제를 포함한 칠국 제군사의 도독을 자칭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고구려에 관해서는 자칭조차 하지 않았다.[36]
5. 기타 사료와의 관련
전후 일본 역사학계는 황국사관에서 벗어나 기키(《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삼한정벌'에 관한 기술은 구체적이지 않고 신화적 과장이 많으며, '삼한정벌설은 당시의 신라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진구 황후의 실재 여부 또한 증명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78] 따라서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여부는 《일본서기》가 아닌 광개토왕릉비나 칠지도 등 당대 사료에 의해 논의하게 되었다.
이진희 와코 대학(和光大) 명예 교수는 한때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이 일본 육군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찬되었다는 설을 주장했으나, 현재 이 학설은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79]
4세기 후기 무렵부터 왜국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 사료와 고고학 사료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태왕비문에서 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켜 고구려와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는 서술은 '공적을 크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 있다고 해도 대강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평가가 일본 학계에서 정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의 기술을 근거로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소국가군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한국 측의 사서 《삼국사기》에서도 거듭되는 왜의 침공이나 신라와 백제가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과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전방후원분 발굴 조사에서 왜국산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된 것을 토대로 왜국의 한반도 진출이 사실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서 '삼한정벌' 설화를 신뢰하지는 않더라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기키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고구려 등과의 격렬한 전투를 전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 이 무렵의 일본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문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일찍이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적이 있었다고 하는 희미한 기억과,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쓰쿠시 아사쿠라궁(筑紫 朝倉宮)까지 거동한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면서, 진구 황후 전설이 창작된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80]
5. 1. 중국, 조선의 사서와의 관련
《일본서기》에는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 때문에 삼한정벌을 일으켰고, 신라를 항복시켜 '우마카이'(馬飼, 복종의 의미)로 삼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76] 이는 신라를 비하하는 동시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면모를 보여준다.[76]가마쿠라 말기의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 갑본(甲本)에는 정벌 동기가 재물 욕심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신라가 먼저 일본을 침공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76]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돌에 "신라의 대왕은 일본의 개이다"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에는 이야기의 뼈대는 《하치만구도쿤》과 같지만, '삼한의 오랑캐'라는 말이 새로 등장하며, 이때 삼한은 고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로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조선은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에도 시대에는 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武家事紀)》 등 삼한정벌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정한론이 대두하고 대한제국을 병합(한일병합)할 때, 일제강점기 일선동조론에 따른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황국사관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술을 의심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진구 황후의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 황후 전설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며, '신라 정벌'은 사실 기록이나 구전이 아니라 6세기 게이타이 천황이나 긴메이 천황 때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쓰다의 견해는 황국사관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고, 쓰다 자신도 곤욕을 치렀다.
전후 일본 역사학계는 황국사관에서 벗어나 《일본서기》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삼한정벌' 관련 기술이 구체적이지 않고 신화적 과장이 많으며,[78] '삼한정벌설은 당시 신라 상황과 맞지 않는다'[78]는 등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 주류 학설이 되었다. 4세기 왜의 한반도 진출 여부는 광개토대왕릉비나 칠지도 등 《일본서기》가 아닌 당대 사료를 통해 논의하게 되었다.
이진희 와코 대학(和光大) 명예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이 일본 육군의 한반도 진출 정당화를 위해 개찬되었다는 설을 주장했으나, 현재 이 학설은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79]
4세기 후기부터 왜국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태왕비문에서 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켜 고구려와 싸웠다는 서술은 '공적을 과장한 것이라 해도 대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가 일본 학계에서 정착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는 왜국이 한반도 남부 소국가군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기》에도 왜의 잦은 침공과 신라, 백제가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전방후원분 발굴 조사에서 왜국산 유물이 출토된 것도 왜국의 한반도 진출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해 '삼한정벌' 설화 자체는 신뢰하지 않더라도, 4세기 후반 이후 왜의 한반도 진출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와의 격렬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이 무렵 일본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郎)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희미한 기억과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쓰쿠시 아사쿠라궁(筑紫 朝倉宮)까지 간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어 진구 황후 전설이 창작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80]
하치만 구도키[11] 갑본에는 신라, 백제, 고려를 "삼개 대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왜국이 신라 등 한반도에 침공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광개토대왕비문 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2011년에는 신라가 왜의 조공국이었다고 기록된 양직공도가 발견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 또는 왜 여왕의 내습"이라는 기술은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왜병의 신라 침공 기사가 빈번하게 나타나므로, 《일본서기》에 전해지는 신라 정벌 전승 자체는 특별히 의심스러운 전승이 아니다. 《일본서기》의 신라 왕자 인질 건은 5세기 초 미사흔 인질 사건, 박제상의 왕자 탈환 사건과 일치한다는 지적이 있다.[37]
5. 2.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4세기 말에 왜가 한반도로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종시키고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운 사실이 고구려 측의 시점에서 기록되어 있다.이진희는 1972년에 광개토대왕비 개찬설을 주장하며, 광개토대왕비 비문은 대일본제국 육군이 대일본 제국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석에 손을 대어 내용을 고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5년 6월 23일에 중국에서 묵본이 발견되었고, 2006년 4월에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젠신이 1881년에 작성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탁본과 사코 본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38] 개찬·날조설은 완전히 부정되었다.[39][40]
5. 3. 칠지도
진구 52년(252년 또는 372년) 9월 10일, 백제왕은 백제와 왜국의 동맹(제왜동맹)을 기념하여 진구 황후에게 칠자경과 칠지도를 하사했다.[41]칠지도에 새겨진 "태□ 4년"을 동진의 태화 4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이 경우, 동진의 태화 4년(369년)으로 간주된다.[41] 다만, 이 경우에는 '태(泰)'자와 '태(太)'자가 다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칠지도에 새겨진 "태□ 4년"을 서진의 태시 4년(268년) 혹은 송의 태시 4년(468년)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으며, 이쪽은 '태(泰)'자가 일치하므로 이를 주장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야마오 유키히사는, 뒷면에 백제왕이 동진 황제를 받들고 있다는[42] 점에서, 369년에 동진의 조정 공방에서 제작된 원 칠지도가 있으며, 백제가 372년 정월에 동진에 조공을 하고, 같은 해 6월에는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에게 원 칠지도가 하사되자, 백제에서는 같은 해에 이를 모조하여 왜왕에게 보냈다고 해석한다.[43][41] 또한, 당시 동진에서는 도교가 유행하고 있었으며, 칠지도의 형태와, 그 백병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 주술력의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43][41][44] 하마다 코사쿠는 백제왕이 원 칠지도를 복제하여 칼을 왜왕에게 하사한 외교는, 당시 백제가 고구려와 군사적 대립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동진과 책봉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41]
5. 4. 양직공도
2011년에 발견된 양의 『직공도』[45]에는 신라가 "어떤 때는 한(韓)에 속하고, 어떤 때는 왜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직공도』는 원제 (효원황제) 소역이 형주자사를 맡았던 526년부터 539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왜에 속했던 시기는 이보다 이전 시대이다. 소역은 양에 조공하는 여러 나라의 외국 사절들의 풍모를 형주와 양의 수도 건강(현재의 난징시)에서 조사했으며, 배자야(469년~530년 몰)의 방국사도를 참고했다.[46]6. 관련 사적, 신사, 관련 전승
하치만 구도키[11]에는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에 걸쳐 신공황후가 신라, 백제, 고려 "삼개 대국"을 정벌한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공 황후의 삼한 정벌과 관련된 신사, 사적, 전승은 많이 남아있다.[47]
- 가시이 궁
- 온지 신사
- 우시마도 신사
이 외에도 스미요시 대사, 해신 신사 등 여러 곳에서 삼한 정벌과 관련된 유적과 전승을 찾아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
6. 1. 스미요시 신사, 스미요시 대사
스미요시 대사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스미요시에 있는 셋쓰국 이치노미야이다.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에서 귀환했을 때,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 7도(현재의 난카이 전기 철도 시치도역 일대)에서 신탁을 받았다. 그 신탁에 따라 아마노호아카리노 미코토의 계통을 잇는 일족이자 셋쓰국 스미요시 군의 호족인 타모미노 스쿠네가 스미요시 삼신을 모신 것이 스미요시 대사의 시초이다. 이후 진구 황후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오진 천황 시대부터는 타모미노 스쿠네의 아들인 츠모리노 토요아다(쓰모리노 토요아다, 쓰모리노 토요노고단)를 시조로 하는 쓰모리 씨가 궁사 씨족을 맡았다.[11]6. 2. 대마도
- 해신 신사 - 원래는 "기사카 하치만구"라고 불렸다.
- 이즈하라 하치만구 신사 - 사전에 따르면, 신공 황후가 삼한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의 시미즈 산에 행차하여, 이 산은 신령이 깃든 산이라 하여 산 정상에 반경을 설치하고, 신경과 폐백을 놓아 천신지기를 모셨다고 한다.[11]
6. 3. 이키
- 성모궁 - 이키시 가쓰모토초 가쓰모토우라에 있다. 삼한 정벌 때 진구 황후가 이키에서 바람을 기다릴 때 행궁을 세운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 가쓰모토 - 삼한 정벌 출항 시 좋은 바람이 불어 이곳을 가자모토(風本)라고 이름 짓고, 개선 시 승리를 축하하며 가쓰모토(勝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 유노모토 온천 - 이키시 가쓰모토초 유노모토우라에 있다. 삼한 정벌 귀로, 진구 황후가 오진 천황을 출산했을 때 산기슭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 이지 신사 - 이키시 고노우라초 아리아스후레에 있다. 삼한 정벌 때 가쓰모토우라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순풍이 불지 않자, 진구 황후가 이지 신사에서 기원하자 돌이 갈라지고 동풍이 불기 시작하여 출항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동풍석(こちいし)이 있다.
- 하치만 신사 - 이키시 가쓰모토초 혼구니시후레에 있다.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 때 출산을 늦추기 위해 사용했다는 진회석이 봉납되어 있다.
- 니시키하마 - 이키시 이시다초 쓰쓰키히가시후레에 있다.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 때 역풍을 만나 이키로 돌아왔을 때 의복이 젖어있어 이곳에서 말렸다고 전해진다.
- 아카세바나 - 이키시 아시베초 하코자키모로츠후레에 있다. 삼한 정벌 귀로, 진구 황후가 여기서 오진 천황을 출산하고 그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6. 4. 후쿠오카현
- 와카마츠 에비스 신사 -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하마마치에 있다.
- 오카다 궁 - 기타큐슈시 야하타니시구 오카다마치에 있다.
- 다카쿠라 신사 - 후쿠오카현 온가군 오카가키정 다카쿠라에 있다.
- 카사마츠 신사 -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 시모아리키에 있다.
- 야마구치 하치만구 -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 야마구치에 있다.
- 오오나치 신사 - 후쿠오카현 아사쿠라군 치쿠젠정 야나가에 있다.
- 미야지다케 신사 - 후쿠오카현 후쿠츠시 미야지에 있다.
- 오리하타 신사 -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 카네자키에 있다.
- 카가미야마 다이진자 - 후쿠오카현 다가와군 카와라정 타카노에 있다.
- 시카노시마 - 진구 황후 전설에 관한 사적이 많이 있다.
- 오도 오오진구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니시구 오도에 있다.
- 케이고 신사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 텐진에 있다.
- 노코노시마
- 우미 하치만구
- 친카이세키 하치만구 - 후쿠오카현 이토시마군 니조정 후카에에 있다.
- 이나츠키 하치만구 - 후쿠오카현 카마시 우루시에 있다.
- 카노다케 신사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니시구 이마주쿠 카미노하라에 있다.
- 소메이 신사 -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오오몬 672에 있다.
- 소메이 우물 -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오오몬 692에 있다.
6. 5. 사가현
- 가미시마 - 사가현 가라쓰시 가미시마. 신들을 모아 군의를 펼쳤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스미요시 신사가 있다.[11]
- 가카라섬 - 사가현 가라쓰시 가카라섬. 오비이와이를 행한 "오비야의 우라"라는 지명이 있다.[11]
- 가가미 신사 - 사가현 가라쓰시 가가미. 전쟁 승리를 기원하며 거울을 모셨다.[11]
6. 6. 효고현
효고현 이보군 이시우미리에 있는 우스키쓰, 우스 강, 미쓰[48], 하기와라 마을은 진구 황후가 배를 발착시켰다는 전승이 하리마국 풍토기에 기재되어 있다. 효고현 이보군 오타 마을의 고토아게오카도 하리마국 풍토기에 기재되어 있다. 아소산은 효고현 이보군에 있으며, 하리마감, 아소 신사 약략 연기, 지혜 주머니 등에 지명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인타쿠다이묘진은 효고현 이보군 핫포산에 있으며, 이와 신사도 관련이 있다.6. 6. 1. 아케다 신라 신사
효고현 히메지시 시고초 아케다에 있는 신라 신사는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에서 개선한 것을 기념하여 정벌한 국가 중 하나인 신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해진다.[49] 다른 설에는 황후가 귀국할 때 이국의 왕자를 이곳에 맡겨두고 후에 그 왕자를 제사 지냈다고도 한다.[50] 『시카마군지』에는 황후가 귀국할 때 신라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이 땅에 머물게 하고 먹이기 위해 갈대밭을 주어 그 땅을 개간하여 양식으로 삼고, 중앙에 사당을 세워 황후를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제신은 진구 황후, 오진 천황, 주아이 천황이다. 배전에는 삼한 정벌이 새겨진 기와가 있다.6. 6. 2. 계족사와 『봉상기』 전승
『봉상기』에 따르면, 계족사는 봉상산에 있던 사찰로, 황후가 데려온 신라의 왕자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51] 전승에 따르면, "황후가 신라의 왕자를 데려가기로 했다. 왕자는 황후에게 도해(渡海)를 무사히 마치고 일역(일본)에 도착하면 가람을 짓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불법(佛法)의 시비(是非)를 알 수 없었던 황후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후는 귀국 후 서역의 불안에 대비하여 부장군 남귀존을 하리마에 머물게 하고 왕자를 맡겼다. 그 후 왕자는 봉상산에 초암을 짓고 천수다라니를 외웠다"고 한다.[51]이 부장군 남귀존은 하리마 국 일궁인 이와대명신의 제신 오호나무치(대국주)를 가리킨다. 『봉상기』 전승에서 불교 전래와 신공 황후 전승의 관련에 대해, 신공 황후가 전리품으로 신라의 불교를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다.[52] 이 신라 왕자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미식거지파진간기와 아메노히보코와의 관련이 지적되고 있지만, 이 전승의 형성에는 송나라 시대인 988년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에서 신라 왕족 출신 승려의 전기 내용이 수용되었다고도 한다.
7. 해석, 연구사
일본서기에 따르면 삼한정벌은 재화와 보물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며, 진구 황후는 신라를 복속시켜 '우마카이'(馬飼, 말처럼 부리겠다는 의미)로 삼으려 했다.[76] 이 기록에는 신라를 비하하는 동시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나라로 동경하는 상반된 인식이 나타난다.[76]
가마쿠라 시대 말기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일본어)에는 정벌 동기가 보물에 대한 욕망에서 원수 갚기로 바뀌고, 신라가 먼저 일본을 침공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76] 또한 우마카이 이야기는 황후가 화살 오늬로 돌에 "신라 대왕은 일본의 개"라고 새겼다는 이야기로 변질되었다.[76]
난보쿠초 시대 말기 《태평기》에는 "삼한의 오랑캐"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여기서 삼한은 고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로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이를 사실로 믿었다.[77]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은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라는 주장이 개전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 고쿠가쿠 연구에서는 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 등 삼한정벌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경향은 메이지 시대 이후 정한론, 대한제국 병합(한일병합), 일선동조론에 기반한 동화 정책(황민화 교육 등)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황국사관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의심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진구 황후의 존재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쓰다 소키치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에서 진구 황후 전설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정벌"이 사실 기록이나 구전이 아니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또는 긴메이 천황 때 꾸며진 이야기로 분석했다. 쓰다의 견해는 황국사관에 위배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쓰다 자신도 곤욕을 치렀다. 1939년 쓰다가 『기기』에 나오는 신화 속 인물과 고대 천황, 쇼토쿠 태자 관련 기술에 대해 실재성을 포함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에 대해, 미노다 무네키 · 미쓰이 고시 등이 불경죄로 공격했다.[54]。1940년 문부성의 요구로 와세다 대학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다. 쓰다와 출판사 이와나미 시게오는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42년 금고형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1944년 공소 시효로 면소되었다.[55]
전후 사학은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의 영향으로 황국사관을 배제하고 쓰다의 설화론을 재검토하여, 진구 황후의 존재는 후대에 재구성된 것으로 여겼다.
다무라 엔초는 신화 조작 시기를 덴무 천황 - 지토 천황 시기로 보고[69], 당시 신라가 왜의 종속에서 벗어나 대등한 관계가 되자, 일본이 율령 국가 체제 구축 과정에서 신라를 '번'으로 규정하기 위해 삼한정벌 설화를 조작했다고 주장한다.[69]
2011년 소실되었던 양직공도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신라가 한(韓)과 왜(倭)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삼한정벌 설화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76]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와 왜국에 비해 국력과 영토가 약소했다.[73] 당시 신라의 영역은 북규슈와 비슷한 정도였고, 백제도 신라의 두 배 정도였다.[73] 자국과 비슷한 넓이의 북규슈와 중국, 시코쿠, 긴키 지방을 영토로 하는 야마토 왕조는 신라에게 위협이었다.[74]
7. 1. 쓰다 소키치와 신라 정벌 설화론
쓰다 소키치는 저서 《일본 고전의 연구》(日本古典の研究)에서 진구 황후 전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라 정벌"에 대해 '사실의 기록 또는 구비전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꽤 후대에, 아마도 신라 정토(征土)의 진실이 잊혀질 쯤에 이야기로서 꾸며진 것 같다'라고 분석하면서, 전설이 성립된 시기를 6세기 게이타이 천황 때나 긴메이 천황 때로 추정하였다.[76] 쓰다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황국사관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쓰다 자신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7. 2. 나오키 고지로에 의한 재검토
나오키 고지로는 쓰다 소키치의 분석을 계승하여 1959년 4월에 "진구 황후 전설의 성립"을 『역사평론』 104호에 발표했다.[57]나오키는 4세기 말에 왜국이 신라를 공격한 역사적 사실과 진구 황후에 의한 신라 정벌 전승이 일치하는 점, 쓰다 소키치의 게이타이 천황, 긴메이 천황 성립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58] 6세기 이후, 특히 스이코 천황 이후의 사적과의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 이 무렵에 전승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59]
; 고구려 전쟁 전승과의 관련
나오키는 오진 천황 시대에 야마토 정권이 신라를 압도한 것은 사실이자 정설이며, 진구 황후 전설과 사적이 무관하다고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신라 정벌 기사에 고구려와의 전쟁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점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60] 왜국이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은 광개토왕비문 등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기키(記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묶어서 부르는 명칭)에 신라 정벌을 다루면서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보았다.[61] 4세기 말에 왜국이 신라 침공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61] 당시 왜국의 최대 강적은 고구려였고,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두에 걸친 한반도 진출이 전승으로 기재된다면,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약소 신라에 대한 승리보다, 강대하고 용맹한 고구려와의 결전 이야기가 전승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신라 정벌만이 전승된 것과 고구려와의 결전이 전승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61] 삼한 정벌의 기술이 성립된 배경에 대해, 나오키는 "5세기 말부터 신라가 강대해지고, 일본의 반도 지배가 동요하게 되었으므로, 일본의 반도에 있어서의 지배권, 특히 신라에 대한 우월성을 역사적으로 기초 지을 필요"가 생겼다고 했다.[62]
; 진구 황후의 실재성
나오키는 진구 황후가 주아이 천황 사후, 정치 군사의 실권을 쥐고, 오진 천황을 출산한 후에도 정권의 중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스이코 천황의 즉위 이전에 이러한 여제가 등장하는 예가 없는 점 등에서, 스이코 시대 이후의 여제를 모델로 구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을 제창했다.[63] 또한, 진구 황후 스스로가 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7세기 중엽에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 구원과 신라 공격을 위해 북규슈로 출정했던 것이 유일한 예이며, 부자연스럽다고도 지적하고 있다.[64]
이처럼 나오키는 신라 정벌 이야기가 6세기 이후 조정 내부에 존재했던 신라 타도 염원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65] 또한, 일본에 의한 신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출정하는 장병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대 신라 관계가 험악해진 스이코 천황 및 사이메이 천황, 덴지 천황 시대의 현실의 요구가 이야기 형성을 촉진했고, 쓰모리씨와 스미요시 대신사나 가시이 궁 등 다양한 전승이 더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65] 삼한 정벌 설화는 신라가 일본에 조공하고 있었다는 점, 일본이 한반도에서 싸운 기억,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신라 원정을 위해 아사쿠라 궁까지 행차했던 고사를 바탕으로 창작, 각색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에다 마사아키, 나오키 고지로 설)[66]
이 나오키에 의한 가설과 해석에 대해서는, 이노우에 미츠사다가 같은 1959년에 간행된 『진설 일본 역사 2권 만엽의 세상』의 좌담회에서 비판했지만,[67] 이노우에 미츠사다는 나오키 설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진구 황후의 이야기가 완성된 것은 사이메이 천황이 660년에 筑紫(쓰쿠시)로 천행하여 당과 신라의 싸움에 대비했던 7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본 국가의 기원』)[68]
7. 3. 신라의 '번'시
다무라 엔초는 신화 조작 시기를 덴무 천황 - 지토 천황 시기로 보았고[69], 당시 신라는 왜국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신라 왕과 왜왕이 대등했으나, 일본은 율령 국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왜를 일본으로, 왜왕을 천황으로 변경하고, 이에 대응하여 신라 왕과 신라를 '번'으로 규정, 그 일환으로 삼한 정벌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69]7. 4. 양직공도의 발견
2011년, 소실되었던 양직공도가 발견되었다. 해당 서적에는 신라에 대해 한(韓)과 왜(倭)의 속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 정벌에 대한 일정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76]7. 5. 당시 국력의 국제 비교
일본서기에는 '삼한정벌'에 의해 한반도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많은 일본인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77]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와 왜국에 비해 국력과 영토가 약소했다.[73] 당시 신라의 영역은 북규슈와 비슷한 정도였고, 백제도 신라의 두 배 정도였다.[73] 자국과 비슷한 넓이의 북규슈와 중국, 시코쿠, 긴키 지방을 영토로 하는 야마토 왕조는 신라에게 위협이었다.[7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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